“반장선거를 하겠습니다. 반장후보자로 나오는 사람은 못하겠다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반을 이끌어갈 것인지 그것에 대해서만 말하세요.” 중 3이 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반장선거를 하기 전 담임의 말이었다. 반장후보는 성적순이었고, 나는 그 속에 속해있었다. 나는 심하게 내성적인 학생이었으며, 반장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친구들이 나를 뽑지 않아서 반장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내 의견 따윈 무시한 담임의 이야기는 듣기 싫었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난 그날 반장선거에 후보자로 나가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는 반장이 싫습니다. 반장에 적합한 사람도 아니구요. 그래서 저를 뽑아주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담임은 나에게 바로 “야, 너 나가!”라고 소리쳤고, 내 이름은 후보 명단에서 지워졌으며, 나는 조용히 내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사실 지금 생각해도 소심하기만 했던 나였기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 <대리사회>를 보고서 깨달았다. 나는 정말 누군가의 욕망을 대리하는 그런 ‘대리인간’으로 살기는 싫었음을……. 그리고 학교라는 공간이 얼마나 폭력적이었으며, 우리는 그런 선생님들의 욕망을 대신하기 위한 행동들을 얼마나 많이 해 왔는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대리사회’라는 한 마디로 규정지을 수 있는 작가를 만났다는 게 너무 반가웠다. 그동안 내가 겪은, 내가 불합리하다 생각해왔던 것들이 이런 ‘대리’라는 단어 하나로 명확해지는 느낌에 그동안 답답했던 무언가가 확 뚫리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국가 시스템에 효율적으로 통제되면서도 자신을 주체로 믿는, 동시에 사유하지 않고 모든 현상을 바라보는 국민은 지금의 국민국가가 지향하는 ‘대리사회’의 이상향이다. 그렇게 ‘대리국민’이 된 이들은 국가를 위한 싸움에 스스로 나선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국가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자신들의 국가’를 위해, 그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과 몸소 싸워나간다. (중략) 우리는 순응하는 몸에 익숙해진 개인들이다. 국가/사회 시스템에 편입되어 있는 한 그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둘러싼 구조와 마주하고, 주체가 되어 사유해야 한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불평해야 한다. 그것은 한 개인이 가진 사회적 책무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성찰이다. 이 부분을 읽고 정말 무릎을 탁 쳤던 것 같다. 이렇게 정확하게 우리 사회를 꿰뚫는 말이 있었던가 하면서 말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우리 국민들은 그렇게 우리가 주체인 줄 알면서 순응하며, 싸워가며 살아왔는가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깨우쳐 가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선거 때만 되면 자신들은 우리의 ‘대리’라면서 우리를 주체의 자리에 잠깐 올려놓았다가 당선이 되면 영원한 갑의 자리에서 국민들을 대하는 국회의원들의 행태와, ‘이 회사는 여러분의 것입니다’를 외치면서 온갖 갑질을 자행하는 기업 오너들의 행태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들의 논리라는 것은 바로 우리를 마치 주체인양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었음을 말이다. 작가는 이야기한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불평해야 한다고. 그래야 주체의 자리에 설 수 있다고. 그러면서 실제 자신이 지방의 시간강사 자리를 던지고 나와 대리기사로 살아온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가 쉽게 읽히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다. 지친 삶의 무게가 그대로 피부로 와 닿는 느낌이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가짜 주인’으로 살다가 비록 ‘대리운전’을 하면서 완벽하게 타인의 공간에서 대리로 살아가지만, 오히려 대학 때보다 더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작가의 모습에 응원을 보내게 되기도 한다. 또한 그 작은 대리기사의 공간에서도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완벽한 타인인 대리기사를 주체의 자리에 올려놓는 배려심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감동을 느끼기도 하고, 술집에서 몇 십 만원짜리 술을 마시면서 대리비 1,2천원이 비싸게 나왔다고 별나게 구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느 공간에서건 자신 밖에 모르는 갑질이 몸에 배긴 사람들이 생각나 씁쓸하기도 하다. 그런 부분들을 읽으면서는 비정규직으로 몸담고 있는 우리 직장 동료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이가 많건 적건 비정규직 사람들의 행동은 정규직의 사람들과 확실히 차이가 난다. 지나치게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운 모습들. 왜 저들은 같은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저렇게 낮추고 조심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게 되는 모습들이……. 그러면서 저 사람들도 작가가 이야기하는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여러 구조적 문제들을 덮어버린다. 나 역시 내가 속한 공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나는 그 구성원이라는 환상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이와 같은 환상에 빠져서 그런 자신의 행동들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순간 자신들이 있던 자리에서 한 발 물러서게 되면 자신들이 주체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들도 함께 떠올랐다. 단순하게 읽으면 지방의 시간강사로 생활하다가 기본적인 노동의 권리도 보장되지 못하는 대학의 폭력적인 시스템에서 버티지 못하고 나와 대리운전을 하는 한 힘없는 노동자의 넋두리나, 사소한 경험담을 담은 이야기인 듯 느껴지는 <대리사회>. 하지만 이 작가의 그런 이야기들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단순히 대리운전기사들만의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인 대리운전 사회를 상세히 설명하면서 우리 사회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것이 옳은 사회이고, 주체로 살아가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동시에 주체로 살아가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함께 주체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역시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따뜻하게, 살아갈만한 공간으로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감히 꿈꿔본다.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당당하게 자신의 일을 사랑하면서 소신 있게 일을 할 수 있는 사회, 그리고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함께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은 자랄 수 있기를 말이다.
대학 강사에서 대리기사가 된 ‘지방시’
천박한 욕망을 강요하는 대한민국 대리사회를 해부하다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대한민국 사회에 은밀하게 자리 잡고 앉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발화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만들며 모두를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인간’으로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힌다. 마치 자신의 차에서 본인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타인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 역시, 결국 이 사회의 욕망을 대리하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사유하지 못하는 이들을 자주 만난다. 그것은 사회적 지위나 명성과는 관련이 없다. 오히려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대리인간’으로 존재하는 이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와이즈베리 신간 대리사회 는 그러한 공간에서 저자가 익숙하게 체험한 3가지 통제(행위, 말, 생각)를 바탕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노동 현장의 단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대리사회에서 한 인간은 더 이상 신체와 언어의 주인이 아니었고, 사유까지도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고 있었다. 타인의 운전석에서 내린다고 해도 저자는 더 이상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 사회 여러 공간에서의 경험에 따라 ‘순응하는 몸’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결국 이 사회의 ‘대리인간’이었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우리에게 주체로서 한 발 물러설 것이 아니라 경쟁하고 남보다 한 발 더 나아가기만을 강요해 왔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가 괴물이 되고 있다.
2015년 말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는 첫 책을 통해서 저자는 자신이 대학에서 보낸 8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지었다. 스스로를 대학의 구성원이자 주체로서 믿었지만 그 환상은 강요된 것이었고, 그는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면서 강의실과 연구실에만 존재했다. 강의하고 연구하고 행정 노동을 하는 동안 그는 사회적 안전망을 보장 받을 수 없었고 재직증명서 발급 대상조차 아니었다. 이후 대학에서 나온 그는 그 시간이 ‘대리의 시간’이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대리운전’이라는 노동을 통해서 대학뿐만 아니라 이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임을 다시 확인했다.
추천의 말
프롤로그 - 대리인간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하며
1부 통제되는 감각들
1. 맥도날드 알바에서 다시 대리운전 기사로
2. 대리인간, 대리국민이 되다.
3. 나에게는 호칭을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4. 호칭이 주는 환각에 익숙해질 때 우리는 대리인간이 된다.
5. 거리의 문법을 배우기 위해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6. 환대할 수 없는 존재들
7. 이제 다시는 괴물에 잡아먹히지 않을 것이다.
8. 손님의 품격
9. 모든 인간은 주체로서 아파하고 주체로서 절망한다.
2부 대리인간이 되는 가족들
10. 아내에게 생긴 버릇 1대리, 2대리
11. 엄마와 아빠는 섬그늘에 굴따러 간다
12. 아내는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13. 부부는 함께 나란히 앉아 있을 때 가장 어울린다
14. 나의 대리가 된 이들을 추억하지 않을 것이다
15. 나는 빠주의 대리운전사
16. 원주를 떠나며, 나의 아내에게
17. 내일은 좀더 오래 살아남고 싶다
3부 주체가 될 수 없는 대리노동들
18. 우리 시대의 노동은 대리노동이다
19. 대리전쟁에 동원되는 노동의 주체들
20. 밀려난 사람들, 서울로 향하지 않는 밤
21. 명절에도 역시 숨은 노동자
22.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데 걸리는 시간
23. 대리사회의 개인은 잠시 즐겁고 오래 외롭다
24. 새벽 두 시의 합정은 붉은 포도송이가 된다
25. 기계들의 밤
26. 요정들의 밤
에필로그 - 경계인에게만 보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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