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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추방


아주 다른 것으로 진입하는 사유의 방식- 한병철, 『타자의 추방』 타자는 어디에나 있다. ‘나’를 상정하는 순간 바깥에는 언제나 타자들이 있다. 타자들이 있어야 ‘나’도 있다는 논리. 지은이는 이런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한다. 타자들이 사라진 시대에 ‘나’는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자기 계발’을 중시한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오직 자기를 계발하는 길뿐이다. ‘자기’와 ‘타자’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은 자기이면서 동시에 타자이다. 자기=타자가 되면 우리는 타자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타자를 함부로 대하면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 경쟁 사회를 이끄는 성과주체는 바로 이러한 타자를 무시한다. 타자를 내쫓은 자리에 성과주체는 ‘자기’를 채워 넣는다. 성과주체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타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성과주체는 대화를 할 줄 모른다. 대화는 타자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과주체는 오로지 ‘자기’와 대화를 한다. 타자가 없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다. 성과주체는 그래서 틈만 나면 우울증에 빠진다. 우울증에 빠진 주체는 언제나 자기를 파괴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지은이는 “타자의 폭력만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의 추방은 아주 다른 파괴 과정을, 즉 자기파괴를 작동시킨다.”(8쪽)라고 말한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한다. 성과를 내면 살아남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면 금방 도태가 된다. 성과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무한 경쟁은 목숨이 걸린 문제이다. 경쟁에서 이기면 살아남고, 경쟁에서 지면 죽는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전쟁상태를 성과주체는 날마다 경험한다. 그는 조직에서 활동을 하지만, 조직은 그를 책임지지 않는다. 성과도, 책임도 성과주체 스스로 져야 한다. ‘자기 계발’ 담론이 왜 신자유주의 사회를 휩쓸고 있겠는가. 자기 계발을 하면 성과를 낼 수 있다. 돌려 말하면 성과를 내지 못하는 주체는 자기 계발을 하지 않은 사람이다. ‘해야 한다’는 당위만으로는 이제 성과를 낼 수 없다.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포르노에서는 모든 몸이 똑같다. 이 몸들은 또한 똑같은 몸의 부분들로 분열한다. 일체의 언어를 빼앗긴 몸은 성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이 성적인 것은 성별의 차이 외에는 아무런 차이를 알지 못한다. 포르노그래피적인 몸은 더 이상 “그 안에 꿈과 신성이 각인되는” 현장도, “호화로운 무대”도, “동화와 같은 표면”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혹하지 않는다. 포르노는 몸뿐만 아니라 소통 자체의 완전한 탈서사화, 탈언어화를 추동시킨다. 바로 이 점에서 포르노는 외설적이다. 벌거벗은 육체를 가지고 유희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유희에는 가상이, 비非진실이 필요하다. 벌거벗은 포르노그래피적 진실은 어떠한 유희도, 유혹도 허락하지 않는다. 성과로 간주되는 성 또한 모든 형태의 유희를 몰아낸다. 성은 완전히 기계화된다. 성과, 성적 매력, 피트니스를 명령하는 신자유주의는 궁극적으로 몸을 최적화해야 하는, 기능적 대상으로 획일화한다. (16~17쪽) 성과주체가 사는 사회는 투명성을 지향한다. 투명사회는 개별성을 부정한다. 개별성은 ‘다른 것’을 가리킨다. 모든 것이 같은 사회는 전체주의일 따름이다. 인간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똑같은 상품이 아니다. 투명사회는 이러한 개별 존재들을 똑같은 몸으로 만들려고 한다. 지은이는 똑같은 몸을 포르노에 비유한다. 포르노에 나오는 몸은 성별의 차이 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살덩어리들이 만나 벌이는 유희 없는 몸짓들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포르노는 사람들을 ‘유혹’하지 못한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포르노는 소통 자체의 완전한 탈서사화, 탈언어화를 추동시킨다. 포르노가 예술이 아니라 외설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거기에는 벌거벗은 육체들만이 있다. 포르노 속 벌거벗은 육체들은 어떠한 유희도, 유혹도 허락하지 않는다. 기계화된 성, 기계화된 몸.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포르노의 논리로 성과주체를 기계로 만든다. 기계가 되어야만 성과주체는 ‘성공’이라는 길에 이를 수 있다. 지은이는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세계화’에도 이러한 포르노 논리가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세계화는 모든 것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것, 비교할 수 있는 것vergleichbar으로, 따라서 같은 것으로 만드는 폭력적 힘이 있다.”(21쪽) 교환할 수 있는 것만이 세계화 전략에 포섭된다. 교환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규정에 매여 있다. 아무것이나 함부로 교환할 수는 없지 않은가. 교환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타자를 타자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타자는 언제나 교환과정에 포섭되는 대상으로 변주되어야 한다. 자본의 순환을 방해하는 타자는 이 세계에서 당연히 배제된다. “같은 것이 같은 것과 만나는 지점에서 세계적인 것은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21쪽)는 말로 지은이는 세계화에 내재된 폭력성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세계화는 모든 나라를 비교 대상으로 삼는다. 비교 대상은 언제나 교환법칙에 종속된다. 교환이 가능하면 세계화에 포섭되고, 교환이 불가능하면 세계화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 법칙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 자본을 손에 움켜쥐고 있는 강자들이다. 지은이는 세계화 논리를 이끄는 사상으로 신자유주의를 제시한다. 착취와 배제가 신자유주의 논리를 구성한다. 신자유주의는 “반옵티콘banopticon,” 즉 추방의 옵티콘을 구축한다. 판옵티콘panopticon이 훈육을 위해 작동한다면, 반옵티콘은 안전을 위해 작동한다. 세계화 경향에서 내몰려 국경을 넘은 난민들을 떠올려 보라. 이들을 받아들이는 국가는 거의 없다. 그들은 잠정적인 ‘괴물들’이다. 괴물들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신자유주의는 같은 것과 더불어 사는 사회를 지향한다. 같은 것과 더불어 살려면 다른 것을 배제해야 한다. 같은 것을 위해 다른 것을 차별하는 걸 신자유주의는 당연하게 여긴다. 한국사회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외국인노동자나 연변 조선인은 같은 것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괴물’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바깥에서 온 타자들을 질서를 파괴하는 ‘괴물’로 인식한다. 사회를 지키려면 괴물을 내쫓아야 한다. 배제는 언제나 차별/추방과 이어진다. 타자인 괴물과 같이 살면 우리 또한 괴물=타자가 된다는 논리. 활력을 부여해주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부정성은 정신의 삶에 영양을 공급해준다. 정신은 절대적인 분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자신의 진실을 획득한다. 균열과 고통의 부정성만이 정신을 생생하게 유지해준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는 긍정적인 것”으로서의 “힘”이 아니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부정적인 것의 곁에 머무를 때만 이 힘”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부정적인 것 곁에 머무르는 대신 그것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을 고수하면 같은 것만 재생산된다. 부정성의 지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성의 지옥도 있다. 부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것도 테러를 낳는다. (49~50쪽) 같은 것은 같은 것을 긍정한다. 같은 것이 모이면 천국이 될 것 같은가? 아니다. 같은 것이 모이면 지옥이 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같은 것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바깥을 인정하지 않는다. ‘바깥’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들은 치를 떤다. 틈만 나면 ‘빨갱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옥죄는 세력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모든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인다. 빨갱이가 진짜로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라는 ‘자기관념’일 뿐이다. 같은 것을 중시하는 사회는 그래서 타자의 부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같은 것이 진열된 쇼윈도에서는 활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것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정신은 같은 것 속에 다른 것이 끼어들 때 활력을 얻는다. 활력을 ‘갈등’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좋겠다. 갈등이 없는 사회는 같은 것들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오늘날 우리는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한다. 부정적인 것은 사유의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같은 것들로 가득 찬 지옥으로 변해버린다. 신자유주의는 타자의 부정성이 사라진 자리에 성공이라는 긍정성을 배치한다. 사회를 긍정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논리로 신자유주의는 기존 사회를 철저하게 보호한다. “신자유주의의 지배하에서 착취는 더 이상 소외나 자기 탈현실화가 아니라 자유와 자기실현, 자기최적화로 진행된다.”(61쪽) 더 이상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착취자로서 타인은 없다. 자기 계발을 믿는 성과주체는 오히려 ‘나’를 실현한다는 믿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나’ 스스로를 착취한다. 성공신화를 이룩하기 위해 성과주체는 자기 몸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소진시킨다. 말 그대로 성과를 내기 위한 신체로 자기 몸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성과주체는 이런 상황을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자유’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선택했으니 실패를 해도 저항할 대상은 자기밖에 없다. 성과주체들이 왜 쉽게 우울증에 빠져들겠는가? 성과주체는 오로지 ‘자기’만 본다. 타자를 전혀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소통 도구로서 디지털 매체가 있지 않느냐고? 트위터나 페이스북, 혹은 카카오톡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상에서 우정을 나누고 있는 듯도 하다. 하지만 “디지털 매체는 탈육체화하는 작용을 한다. 디지털 매체는 음성으로부터 거칢을, 육체성을, 나아가 공동空洞과 근육, 점막, 연골의 심층을 빼앗는다.”(90쪽) 디지털 매체에서 펼쳐지는 소통에는 에로스가 부재하다. 에로스는 유혹하는 타자를 가리킨다. 디지털 매체를 떠도는 존재들은 ‘자기’가 변형된 존재들이다. 같은 것의 무수한 반복. 앞서 말한 대로 같은 것의 반복은 그 누구도 유혹하지 못한다. 유혹은 상대에게서 다른 것을 느낄 때 이루어진다.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 ‘나’와 다른 무언가가 상대에게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래서 연인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제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도 연인은 언제나 그 의미를 빠져나간다. 매끄러운 타자가 아니라 거친 타자로서 연인은 자신을 증명한다. 사랑이 언제나 ‘두 사람의 만남’으로 정의되는 이유라고 하겠다. 경청에는 정치적 차원이 있다. 경청은 타인들의 현존재에 대한, 그들의 고통에 대한 행동이자 적극적인 참여다. 경청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매개하여 비로소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을 듣지만, 타인들을 경청하고 그들의 언어와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은 갈수록 잃어버리고 있다. 오늘날에는 각자가 자기 자신, 자신의 고통, 자신의 두려움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혼자 남아 있다. 고통은 사유화되고 개인화된다. 그래서 고통은 자격도 없이 자아와 자아의 심리를 고치겠다고 나서는 치료의 대상이 된다. 누구나 자신의 약점과 부족함을 부끄러워하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책임을 떠넘긴다.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 사이에 어떠한 연결도 생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고통의 사회성이 간과되고 만다. (115~116쪽) 신자유주의 논리에 익숙한 성과주체들은 타자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 성과주체는 자기 아름다움에 빠진 나르시스처럼 오로지 자기만 보는 존재이다. 나르시스는 에코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같은 것의 지옥을 살아가고 있다!
세계화에서 테러리즘, 진정성, 환대의 문제까지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 한병철의 냉철한 사회 분석

타자가 있었던 시대는 지나갔다. 비밀로서의 타자, 유혹으로서의 타자, 에로스로서의 타자, 욕망으로서의 타자, 고통으로서의 타자가 사라진다. 오늘날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에 밀려나고 있다. 같은 것의 창궐이 사회체(社會體)를 덮치는 병리학적 변화들을 낳는다. 박탈이나 금지가 아니라 과잉소통과 과잉소비가, 변화와 부정이 아니라 허용과 긍정이 사회체를 병들게 한다. 한병철은 오늘날의 사회를 특징짓는 공포, 세계화, 테러리즘, 진정성의 추구와 같은 현상 속에서 같은 것의 폭력을 추적해 나간다.

저자 한병철 교수가 전작 피로사회 가 ‘나는 할 수 있다’는 명령 아래 스스로를 착취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에로스의 종말 이 사랑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 책에서는 그런 상황을 불러온 근본 원인으로 저자가 지목했던 ‘타자의 소멸’ 현상을 본격적으로 파헤친다. 저자는 오늘날의 세계가 겉으로는 자유와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것이 지배하는 지옥’일 뿐이라며,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대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세계적인 것의 폭력이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폭력이 인간을 어떻게 무력화시키는지 상세하게 보여준다. 또한 ‘테러리즘’ ‘난민’ ‘환대’ ‘진정성 추구’와 같은 정치사회적 현상들이 타자의 소멸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분석한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 대한 예리한 고찰을 보여주는 이 작은 책은 우리의 세계가 어떠한 난관에 봉착해 있는지 뼈아프게 돌아보게 한다.


같은 것의 테러
세계적인 것의 폭력과 테러리즘
진정성의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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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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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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