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먼 이국땅 독일에서 시인은 이제 기억 속으로 사라질 어떤 역으로 천천히 걸어갔다.나도 가고 누구도 가야하는 역이 아닐까 싶다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제목 때문에 이 시집을 샀다고 해야 가장 정답일 것 같다.‘역’은 내가 좋아하는 단어 중에 하나라서 그랬을까 그냥 손이 갔다.나는 역에서 누구를 애타게 보내본 적이 있었나이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시집을 읽었다.현대시가 그렇듯 역시나 어려웠지만, 그래도 가끔씩 만나는 알 듯 모를 듯한 어떤 시어들이 나를 멈추게 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차를 기다리다가 역에서 쓴 시들이 이 시집을 이루고 있다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 나는 역을 떠났다 다음 역을 향하여시집 첫머리에 나오는 ‘시인의 말’이다너무 좋아서 한참이나 읽고 또 읽었다.시인은 이 세상에 없지만 시인의 시는 영원히 남아 우리들 가슴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나길 바란다.
저 오래된 시간을 무엇이라 부를까
그 모든 시간의 ‘사이’를 둘러싼 상상력과 질문들
우리말의 유장한 리듬에 대한 탁월한 감각, 시간의 지층을 탐사하는 고고학적 상상력, 물기 어린 마음이 빚은 비옥한 여성성의 언어로 우리 내면 깊숙한 곳의 허기와 슬픔을 노래해온 시인 허수경이 여섯번째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를 출간했다. 2011년에 나온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이후 5년 만의 시집이다. 물론 보다 아득한 세월이 시인과 함께한다. 1987년에 등단했으니 어느덧 시력 30년을 바라보게 되었고, 1992년에 독일로 건너가 여전히 그곳에 거주하고 있으니 햇수로 25년째 이국의 삶 속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고 있는 셈이다.
아주 오래전, 내가 무엇을 하든 결국은 시로 가기 위한 길일 거야. 그럴 거야. (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 2001)라고 했던 그의 말을 새삼스레 떠올려보게도 되는, 산문도 소설도 아닌 다시 시집으로 만나는, 마디마디 가뭇없이 사라지기 전 가슴 깊이 파고들어 먹먹하기만 한 시 62편이 이번 시집에 담겼다.
1부
농담 한 송이
그 그림 속에서
이 가을의 무늬
이국의 호텔
베낀
포도나무를 태우며
네 잠의 눈썹
병풍
2부
딸기
레몬
포도
수박
자두
오렌지
호두
오이
포도메기
목련
라일락
3부
동백 여관
연필 한 자루
우연한 감염
문득,
너무 일찍 온 저녁
죽음의 관광객
내 손을 잡아줄래요?
나비그늘 라디오
온몸 도장
아침식사 됩니다
돌이킬 수 없었다
아사(餓死)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4부
수육 한 점
사진 속의 달
발이 부은 가을 저녁
방향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루마니아어로 욕 얻어먹는 날에
매캐함 자욱함
운수 좋은 여름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유령들
빙하기의 역
가을 저녁과 밤 사이
너, 없이 희망과 함께
지구는 고아원
푸른 들판에서 살고 있는 푸른 작은 벌레
겨울 병원
5부
눈
엄마와 나의 간격
네 말 속
지하철 입구에서
가짓빛 추억, 고아
설탕길
카프카 날씨 1
언제나 그러했듯 잠 속에서
카프카 날씨 2
카프카 날씨 3
밥빛
나는 춤추는 중
해설 | 저 오래된 시간을 무엇이라 부를까 | 이광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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