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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타임


마고 래너건의 단편소설집이다. 장르로 따지면 SF 판타지 소설이지만 판타지소설이 가진 비현실적인 요소는 적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낯설게 이야기로 만들어 풀어내고 있다.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어 집중하기 좋은 책이며 책 소개처럼 오직 상상역 하나로 지어 올린 기묘한 이야기 들이다. 첫번째로 재미나게 읽은 단편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살이 찌는 이상한 세상의 이야기를 그린 <말하고 키스하라>였다.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속에 쌓아 두면 살이 된다는 설정이 독특하다. 주인공 에번도 한때 뚱보였다가 상담사의 도움으로 살을 거의 다 뺐지만, 또다시 살이 찔 기미가 보여 초조해한다. 에번을 살찌게 만드는 비밀은 다름아닌 소꿉친구 앤트워넷을 이성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음에 말하지 못하는 감정이 살이 된다는 설정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시원하게 들어낸다. 많은 감정을 숨기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원한 단편소설로 느껴졌다. 상담을 받게 되면 상담사들은 맨 처음 뚱보들을 한데 모아 놓고 자기 몸속을 상상으로 그려 보게 한다. 먼저 내 혈관 영상을 보여 주면서 건강한 적혈구 사이를 떠다니는 노란 방울 모양의 지방 덩어리들을 가리킨다. 그러고는 이야기 벌레들이 혈관 속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자루에 구슬을 담듯 지방 덩어리들을 깔끔하게 모아 배설 기관으로 보내는 광경을 그려 보게 한다. 내 몸은 그렇게 매끄럽게 돌아가는 조그만 사회이고 나는 그곳의 지도자라서 어디든 내가 원하는 곳으로 벌레들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두번째로 흥미롭게 읽은 단편은 <밤백합>이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세상에서 구차한 삶을 살고 있는 첸코. 어느 날 그의 앞에 공중을 떠다니는 내장 덩어리가 나타난다. 첸코는 마치 강아지처럼 자신을 따르는 그것을 ‘백합’이라 부르며 정을 붙인다. 정확히 백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희망이 없어진 아이를 항상 따라 다니던 존재. 그 존재가 어떤 도움을 주거나 할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삶은 더 피폐해지고 더이상 잃은 곳이 없는 상태가 되었을때 밤백합도 사라진다. 여기서 밤 백합은 아이가 지니고 있던 삶의 끝에 대한 공포이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아니였을지 생각되었다. 밤이면 백합은 등불처럼 환해졌지만, 빛을 내는 것은 아니었다. 바깥에서 불빛이 비칠 때 보면 백합은 그때그때 다른 곳에 있었다. 습기로 얼룩진 구석에 소복이 쌓여 있기도 하고, 첸코 바로 위에 떠서 투명한 공기 층 같은 곳에 밑바닥을 납작하게 붙이고 물웅덩이처럼 퍼져 있기도 하고, 창가에 후줄근하게 늘어져 있기도 했다. 어느 날 밤에 첸코가 잠에서 깼을 때는 백합이 물 위에 떨어진 기름처럼 달빛이 비치는 방 안에 죽 펼쳐져 있었는데, 훤히 드러난 장기들이 방문 근처에 한데 모여 가만가만 흔들리고 있었다 세번째 단편은 <여왕의 관심>이다. 긍지높은 전사가 되고 싶었던 디볼의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고군분투기를 담고 있다. 타고난 용맹함 덕분에 여왕의 눈에 들어 번식 담당이라는 영광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것 덕분에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고 전사로서 살아갈수 없는 운명을 맞이 한다. 디볼은 새로운 신분에 저항하려 하지만, 결국 본능 깊숙이 각인된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군체의 번영을 위해” 운명에 몸을 내맡긴다. 디볼을 향해 오는 여왕의 욕구와 벗어나려는 디볼의 몸부림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 처음으로 디볼은 머릿속의 지도를 볼 수 없었다. 디볼은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점점 강하게 다가오는 여왕의 욕구가 저릿저릿한 덩굴손을 뻗어 자신의 등뼈를 휘감고, 자신의 허리에서 뱀의 숨결처럼 야비하고 뜨거운 공포를 자아내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그 밖에 시간여행과 직업여행이라는 이야기를 담은 <화이트타임>, 타인의 시선으로 인간의 잔혹함을 고발하는 <봉헌식>, 네 요정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한여름 밤의 임무>등 우리가 쉽게 느끼는 감정을 낯설게 표현해내는 뛰어난 단편들이 많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약간은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그건 이 책에 소개된 이야기에 나를 대입시켜 보느라 혼란스러움을 느낀것이 아닌가 싶다. 상상력 그리고 감정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 <화이트타임 > 초록색 글씨는 본문 내용의 일부임을 알려드립니다. *본 리뷰는 출판사의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그 경계에 놓인 열 편의 이야기
오직 상상력 하나로 지어 올린 낯설고 기묘한 이야기 박물관

2012년 4월에 출간된 블랙 주스 는 마고 래너건이라는 생소한 호주 작가의 이름을 국내에 알리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은유와 상징이라는 가장 문학적인 방식으로 구현해 낸 낯설고 기묘한 세계와의 만남은, 장르적 성격이 강한 SF?판타지에 익숙한 우리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블랙 주스 를 읽은 독자들의 찬사는 입소문을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고, 깊이 있는 세계관, 간결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장, 신선하고 시적인 언어가 돋보이는 작품 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제53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사계절1318문고 여든여덟 번째 책 화이트 타임 은 마고 래너건의 또 다른 작품으로, 블랙 주스 보다 4년 앞서 출간된 책이다. 오랫동안 청소년 장편소설을 써 온 작가가 처음으로 쓴 판타지 단편집으로, 낯설고 기묘한 ‘마고 래너건 식 세계’의 시원(始原)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마고 래너건은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독창적인 상상력과 우아한 언어를 갖춘 작가’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작품집에 실린 단편 「여왕의 관심」은 오리얼리스 상 청소년 단편 부문을 수상하는 영예까지 안았다.

화이트 타임 에는 총 열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모든 이야기는 별다른 배경 설명 없이 독자들을 곧장 사건 속으로 끌어당긴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SF물부터 중세시대 왕이 등장하는 시대물과 요정이 나오는 판타지까지, 작가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독자들을 이쪽에서 저쪽, 혹은 그 사이 어디쯤에 데려다 놓는다. 물기를 뺀 담백한 묘사와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은유,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 없는 상상력 등 마고 래너건만의 매력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1. 화이트 타임
2. 봉헌식
3. 말하고 키스하라
4. 여왕의 관심
5. 커다란 분노
6. 밤 백합
7. 소원이 없는 소년
8. 한여름의 임무
9. 웰컴 블루
10. 재산

작품 해설